감독의 공적인 페르소나
많은 감독은 공개적인 등장, 인터뷰, 미디어, 스튜디오 홍보, 자기 홍보를 통해 자신의 '공적인 페르소나'를 개발한다. 이 페르소나가 사회에 유통되면 감독의 영화를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미친다. 이런 '전기적인 전설'을 연구하는 것이 유용한 이유는 그것이 영화의 진정한 의미나 더 좋은 의미를 말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관객이나 비평가가 감독의 작품을 해석하고 수용하는 데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어릴 때 토요일 낮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결과 영화의 마술을 가지고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순진한 어린이의 페르소나를 개발했다. 그는 영화를 만드는데 일종의 '경탄할 만한' 기쁨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페르소나처럼 그의 대부분의 영화도 사회의 심각한 이슈보다는 할리우드 오락 세계의 유아적인 놀라움을 다루는 순진한 판타지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페르소나로 인해 비평가와 대중은 그의 영화에서 몇몇 거슬리는 요소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가령 누군가가 '인디애나 존스와 운명의 사원'에서 여성의 성차별적인 묘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면 많은 사람은 영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며 영화 속 인물들은 남녀 관계를 그런 식으로 습관적으로 묘사했던 옛 장르에서 따왔다는 말로 일축할 것이다. 그런 답변이 맞을지 모르나, 오늘날 관객을 위해 1940년대 여성 이미지를 재창조하는 것이 어떤 문화적 의미를 갖는지와 같은 질문을 하지 못하게 된다. 옛날 영화에 빠진 순진한 어린이의 이미지는 비평을 독려하기 보다는 무장 해제를 하는 연막이 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스필버그는 나중에 새롭고 성숙한 페르소나를 개발했다. 거기에는 '아미스타드',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그리고 '뮌헨'과 같은 영화의 제작도 포함되었다. 그의 공적인 페르소나 또한 변화를 겪게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영화의 세계에서 놀고 있는 경이감에 찬 순진한 아이처럼 말하는 대신 이제 그는 사회적으로 책임 있고 자성적인 어른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가령 그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유산에 관심을 갖고 유대인과 관련된 많은 사회적 문화적 운동과 프로젝트에 가담했다. 많은 기대를 모았던 첫 번째 해리 포터 영화를 감독할 기회를 거절한 후 스필버그는 동화책을 원작으로 한 또 다른 블록버스터를 만드는데 더 이상 도전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위에서 강조한 것처럼 이 새로운 페르소나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스필버그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만큼 성장하거나 변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가령 유대주의에 대한 훌륭한 관심과 노력에서 불구하고 '쉰들러 리스트'에서 유대인과 나치 대학살의 묘사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주의해서 계속 비평할 필요가 있다.
히치콕은 '서스펜스의 대가'라는 호칭을 갖게 되었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게 놀라게 하는 것을 무엇보다 즐기는 괴짜로 자신을 표현하는 데서 기쁨을 누렸다. 그는 동시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효과를 창조할지 정확하게 알았던 테크닉의 귀재라는 이미지도 만들어 나갔다. 그러한 페르소나는 감독이 사람을 놀라게 함으로써 얻는 가학적 즐거움을 가볍게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종종 극장 예고편이나 텔레비전극에서 영화를 소개할 때 심술궂은 유머로 껄껄하고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감독의 작품에 대한 정신분석적 접근의 효용성을 논의하면서 시사했듯이 그러한 가학성이 통제할 수 없는 여성을 처벌하는 데로 향해질 때 거기에는 뭔가 꺼림칙한 것이 있다. 스필버그의 경우가 그랬듯이 그가 제시하는 것처럼 순진한 재미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히치콕은 인터뷰에서 영화 속 재미있는 장면의 기술적인 면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그러한 페르소나 때문에 '사이코'에서의 샤워 살인 장면을 보고 우리는 편집의 걸작이라고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논의를 하게 되면 나중에 남자 탐정은 비슷한 칼 공격을 받을 때 금방 죽는 데 반해 벌거벗은 여자는 왜 이런 식으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게 된다.
전기적 작가
작가성 연구의 현대적 형식 중 하나는 영화를 만든 살아있는 전기적 인물에게로 돌아가는 것이고 아주 새로운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 게이와 레즈비언 학자들은 감독의 성적 지향성을 아는 것이 감독의 영화 수용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지금까지 보여주었다. 가령 도로시 아즈너가 레즈비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캐서린 헵번이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는 용감무쌍한 비행사로 나오는 '크리스토퍼 스트롱'과 같은 영화에 새로운 의미가 열린다. 아즈너의 섹슈얼리티를 직접 인정할 수 없었던 시대에 만들어진 그러한 영화들은 독립적인 여성, 여성 유대, 금지된 사람과 같은 이슈를 다루었으며 레즈비언 관객들로 하여금 동료 레즈비언이 자기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작가관은 영화의 수용 맥락에 주로 초점을 맞춘다.
감독을 영화의 작가로 간주할 수 있으려면 소설의 작가와 비교하기보다는 협동적인 산업적 과정 내에서 영화를 만들어가는 힘으로 작가성을 생각해야만 한다. 또 한 가지 조건은 작가를 신적인 인물로 만들기를 거부하고, 그의 영화를 그룹으로 분류하여 중요한 사회적 미학적 이슈의 의미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와 무대에서의 연기에 대한 이야기 (0) | 2023.09.12 |
---|---|
시리즈, 속편, 리메이크에 대한 이야기 (0) | 2023.09.11 |
감독의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 (0) | 2023.09.11 |
작가와 감독에 대한 이야기 (0) | 2023.09.10 |
화면 공간, 색상, 사운드에 대한 이야기 (0) | 2023.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