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이란 무엇인가?
최근에 영화와 다른 문화연구 학자들이 자신들의 작업에 수용의 요소를 끌어들였다. 그것의 역할은 정확히 무엇인가? 수용학은 역사적으로 특정한 관객이 영화와 다른 예술 작품에 반응하는 다양한 방식, 그리고 그러한 반응의 이유를 연구한다. 그것은 영화의 모든 의미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람의 맥락에 의해 어느 정도 형성되고, 관객이 변하듯이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관객은 영화의 의미를 수동적으로 받는 사람이 아니라 의미의 생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사람이다. 의미는 단순히 텍스트에만 기초한 것이 아니라 텍스트와 맥락의 상호 작용과정의 결과이다. 수용은 그 맥락의 중요한 부분이며 영화가 상영된 극장의 종류, 영화의 광고 형태, 시사적 사건과의 연관성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수용학은 영화의 한 가지 의미에 대한 단순화된 일반론, 혹은 한 가지 의미만 신빙성이 있다는 가정을 지양하도록 도와준다. 그것은 다른 인종, 계층, 종족성, 젠더, 성적 지향성을 가진 관객들이 보는 시기에 따라 영화를 다르게 이해하는 복잡한 방식을 파악하게 해준다. 수용학은 영화에 내재된 형식의 의미,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바, 다른 관객이 말한 내용이 아니라 영화가 실제로 관객에 따라 어떻게 다른 의미를 가졌는지를 기반으로 한다.
'원초적 본능'은 개봉 당시 레즈비언의 묘사 방식으로 인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영화가 제작되고 있을 때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으며 게이와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는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와 대본 읽기에 기초하여 수정하라고 요구했다. 완성된 영화를 보기도 전에 게이와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대표들은 그 영화를 비난했고, 개봉일에는 뉴욕과 같은 대도시 극장에서 조직적인 시위와 피켓 항의가 있었다. 동성애공포증을 표현했다는 비난과 거기에 대한 감독과 배우들의 반응은 뉴스 매체에서 널리 다루어졌다. 이러한 수용 맥락은 관객을 영화의 그러한 양상에 강하게 반응할 수 있는 위치에 놓는다. 이 영화를 관객들이 보지 않기를 원하거나 적어도 할리우드의 동성애공포증의 공격적인 사례로 보기를 원하는 항의자들은 영화 자체나 배급자가 홍보하려는 것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는 맥락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 동성애공포증의 사례로 제작되고 배급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다.
항의자들은 자신들이 게이와 레즈비언 커뮤니티 전체를 대표한다고 주장했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었다. 가령 어떤 레즈비언들은 영화에서의 레즈비언 묘사가 거슬린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거슬리는 내용이 이성애자 남성 감독 쪽의 뿌리 깊은 두려움과 불안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이 감독들은 남들과 다르고 위협적인 섹슈얼리티의 형식으로서의 레즈비어니즘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공공연히 인정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이 기본적으로 같다는 전제를 가지고 게이와 레즈비언의 섹슈얼리티를 포용한 영화들이 있기는 하지만 '원초적 본능'의 제작자들은 몇몇 이성애자와 몇몇 동성애자 사이의 진정한 차이를 인정하고 그를 통해 그러한 차이가 이성애자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접근은 어떤 문제를 드러내는 증상으로 이 영화를 읽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영화를 무조건 비난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이 그 영화에서 배우기를 권유한다. 특정 그룹 내에서도 관객의 반응은 다양하고 다면적이다.
이처럼 이 영화의 널리 알려진 면이 수용 맥락을 구성하지 않았더라면 관객은 이 영화를 그냥 또 하나의 에로틱 스릴러로 볼 자세가 되었을 것이고 칼을 휘두르는 살인자로서 레즈비언을 묘사한 것에 대해 특별히 신경 쓰려고 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영화가 20년이 지나 폴 버호벤 감독 회고전의 프로그램으로 상영되었더라면 그러한 회고는 새로운 맥락을 조성하고, 관객은 버호벤의 다른 영화와 연관해서 보는 입장이 될 것이다. '원초적 본능'의 최초 수용 맥락은 대부분의 영화보다는 좀 더 극적이었지만 수용의 다양성의 문제는 항상 작동한다.
수용의 이러한 다양성은 영화의 소재뿐 아니라 전적으로 영화 외적인 사건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의 프로젝트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스튜디오의 지원을 받지 못한 깁슨 자신이 대부분의 재정을 댔고, 거의 무명의 배우를 썼고, 살아있는 사람 중 알아들을 사람이 거의 없는 라틴어와 아람어라는 두 개의 죽은 언어를 자막과 함께 사용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개봉 이전에 그 영화를 반유대주의적이라고 하는 쪽에서 영화에 대한 분노가 팽배했다. 자기들의 입장을 알리기 위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반유대 적 인물로 깁슨의 독일계 아버지를 규정하는 일도 있었다. 개봉이 되자 어떤 사람들은 그 영화를 반유대주의적으로 보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영화가 주류 영화 관객에게 배급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자 깁슨은 영화의 개봉을 도와달라고 많은 교회 단체에 호소했고 영화는 엄청난 재정적 성공을 누렸다.
2년 후인 2006년에 깁슨은 음주운전 혐의로 체포되었고 체포하는 경찰에게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을 했다. 깁슨은 발언에 대해 사과했고 자신의 뉘우침을 보여주고 보상하려는 희망으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으로 어떤 사람들은 2년 전에 나온 영화의 정치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깁슨 아버지의 정치 성향, 몇몇 종교 집단의 분노와 교회 단체의 지지, 2년 후 깁슨의 취중 망언과 사과, 이 모든 것들은 영화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영화의 수용을 형성하고 재형성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2년이라는 시간 내에 같은 영화가 두 개의 전혀 다른 수용 맥락을 갖게 되었다. 2006년 말에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언론에서 반유대 적 발언과 후유증을 다룬 것과 별개로 영화를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부터 10년 후에 이 영화를 처음 접하는 대부분의 관객에게는 2004년과 2006년의 수용 맥락이 완전히 잊히거나 실종되고, 대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맥락이 자리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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