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문학의 다른 특성
우리는 영화에서 언어가 수행하는 역할의 한계로 인해 영화는 언어가 주도적인 역할 뿐 아니라 유일한 역할을 하는 문학과의 갭은 훨씬 더 크다. 문학은 공연되지 않는다. 문학에는 배우나 해석자도, 무대 세팅이나 조명, 혹은 음악도 없다. 문학은 그냥 읽는 것이다.
영화를 감독의 매체로, 연극을 작가의 매체로 인식하는 것은 여러 가지 창작의 역할 중에 그들의 역할이 주도적이라는 공통된 생각에서이다. 문학은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다. 편집자가 원고의 모양을 다듬거나 바꾸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작가가 유일한 창작의 역할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문학은 언어가 제한된 역할을 하는 영화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둘을 혼합하는가? 그렇다면 왜 영화 제작사에서 인기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수백만 달러를 지불하며, 고전 소설로 반복해서 눈을 돌리는가? 한가지 대답은 경제적인 문제인데 베스트셀러나 유명한 소설을 각색한 영화가 자주 흥행의 성공을 거두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설을 좋아했던 사람이 왜 소설을 각색한 영화를 보고 싶어 하며, 두 가지 형식이 거의 상호 교환할 수 있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많은 사람이 느끼느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한 가지 대답은 우리 문화가 서사 작품에서 형식보다는 스토리를 강조한다는 사실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영화가 무엇에 대한 것이냐고 물으면 스토리를 이야기하면서 대답한다. 그러나 스토리는 자유 모티프를 포함한 플롯 속으로 엮이어 들어갈 때 미학적 효과와 복합성을 갖게 된다. 공간의 표현과 같은 영화의 형식적 요소가 서사 요소만큼, 가끔은 그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았다. 게다가 우리 문화가 스토리 아이디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양태는 미학적 영역에서 법적인 영역까지 확장된다. 영화의 역사를 보면 리메이크도 많이 있고 스토리 소재 사용권을 둘러싼 많은 소송이 있었지만, 이전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을 모방했다고 감독이 소송을 당한 전통은 없다.
스튜디오가 베스트셀러 소설의 판권을 위해 수백만 달러를 지불하는 것은 독자들이 스토리 서술 방식이나 스타일보다는 스토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단 저작권료를 지불하면 표절로 고소를 당하지 않게 된다. '쥐라기 공원'이라는 소설의 출판 이후에는 크라이튼의 소설에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고 오늘날 DNA로부터 재창조한 공룡이 난동을 부리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감독은 심각한 법적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스튜디오에는 가끔 자기들의 소재와 스토리가 전에 나온 문학 출판물과 유사하기 때문에 소송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원작에 대한 저작권료를 지불하거나 사의를 표시해 왔다.
둘 다 같은 스토리와의 원작을 공유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문학은 극단적으로 다른 창작 형식이다. 영화와 문학은 관객과 독자로부터 아주 다른 기술과 정신적 활동을 요구한다. 조각가이면서 화가인 사람도 있었고 시인이면서 동시에 소설가인 사람도 있었지만, 영화를 감독했던 몇몇 소설가를 제외하면 주요 영화감독이 주요 소설가인 사람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몇몇 영화감독들이 소설을 쓴 적이 있지만 문학적 시각에서 중요한 작가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이 두 가지 형식이 미학적으로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지만 중요한 서사적이고 문화적 전통은 공유하고 있다. 하나의 형식으로서 소설은 19세기에 정점에 도달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와 같은 몇몇 20세기 소설이 새로운 방향을 탐색했지만 20세기 소설은 주로 19세기 소설, 특히 사실주의 소설의 문학적 전통에 의존해 왔다. 고전 영화는 같은 전통에 기대어 왔고 이것이 두 형식 간의 문화적 유사성을 설명한다.
영화와 문학의 공통적인 특성
영화와 소설은 모두 스토리를 말하는 형식인 서사 형식이다. 문학과 영화가 시각적, 청각적, 연기, 디자인, 수사적 전통을 공유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서사적 전통은 분명히 공유한다. 문학과 영화는 시간을 통해 특정 종류의 인물의 행동을 따라 진행하는 스토리를 들려준다. 이러한 영역에서 두 형식은 많은 유사성이 있다.
초기 20년 동안에 영화는 10분 남짓의 단편에서 한 시간이 넘는 영화로 발전했고 길어진 길이를 유지하기 위해 좀 더 복잡한 스토리텔링 기법을 개발했다. 영화는 당시 지배적인 서사적 적통이던 19세기 소설의 전통에서 이런 기법들의 일부를 배웠다. 이런 기법들은 역사적 맥락과 관객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소설 자체도 18세기 초에 시작된 비교적 새로운 형식이었다. 19세기에 소설이 큰 인기를 누리던 시기는 급증하는 중산층의 기호를 맞춘 정기 간행물과 대여 도서관 같은 새로운 체제와 연관이 있다. 그때는 또한 유럽, 특히 영국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였고 그것이 소설의 소재와 인물에 잘 나타나 있다.
플롯과 인물은 여러 방법으로 구출될 수 있지만 만고불변의 것은 아니다. 가령 18세기 전, 특히 중세와 르네상스 서사에서는 우화적이나 완전히 상징적인 진행을 따라 성격을 발전시키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18세기 종교 서사인 '천로역정'에서는 인물들이 심리적 복합성을 갖지 못했으며 오히려 도덕적 속성을 상징했다. 주인공의 이름은 크리스천, 다른 인물들의 이름은 세속적 지혜자, 희망, 거대한 절망, 신실한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15세기 희곡 '에브리맨'에서 인물들의 이름은 세상의 재산, 성한 행위, 에브리맨이었다. 소설의 발생으로 심리적으로 개성이 강한 인물이 등장했는데 게으름이나 자만심보다는 올리버 트위스트나 몰 플랜더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마찬가지로 중세의 연대기는 시간의 경과에 따른 사건의 기록을 들려주는 경향이 있다. 연대기는 종종 한 무리의 인물들에서 다른 인물들로 이동한다. 사실주의 소설에서 전개하는 플롯은 시간에 따라 사건을 기록하는 것보다도 중심인물들을 설정하고 그들에게 몇 가지 목표를 세운 다음 처음부터 끝까지 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는 대신 그 목표를 성취 혹은 성취 못 하는가를 중심으로 소설을 전개하는 데 관심이 있다. 초기 영화는 광범위한, 주로 중산층의 관객에게 호소하기 위해 서사적 복합성을 개발했고, 빅토리아 조 소설의 양상은 전용하면서 소설의 소재와 서술 스타일을 포함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어느 장면에서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남편과 남자친구의 귀환을 기다린다. 영화는 미국 남북전쟁 시기에 대한 1939년도 영화이고 소설은 19세기 초에 대한 1850년도 소설이다. 두 작품의 서사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소설과 1935년 판 '데이비드 코퍼필드' 영화의 공통점보다 적은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많은 점에서 디킨스의 소설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서사적인 면에서 둘 다 메인 플롯과 그에 관련된 많은 서브플롯이 있다. 둘 다 주인공의 목표를 설정하는 방편으로 주인공들의 사회적 환경을 설정하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마지막에 해결되는 주된 문제점들을 설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작품이 전개되면서 주된 목표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과 이상적인 로맨스가 된다. 소설은 데이비드에게 행복하게 끝나고, 영화는 스칼릿에게 불행하게 끝나지만, 두 개의 결말 모두 주된 문제의 분명한 해결이다. 그 해결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두 인물 모두 마지막에 살아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삶에서 더 많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서사들은 그들의 삶을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그들의 삶과 얽힌 특정한 서사적 질문들을 중심으로 구축되었다. 그 질문들이 해결되면 서사도 해결된다. 인물과 서사 구축에서의 이러한 유사성은 문학과 영화 간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밝혀주며 등가물이나 충실성의 개념을 다루지는 않는다. 두 형식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두 형식 모두를 조명할 수 있는 전통을 공유한 것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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